아이디어 부족

회사를 운영한다고 하면, 곧잘 묻는다. “당신의 비젼은 무엇입니까?” 회사가 작은 규모일수록 이 질문은 “당신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무엇입니까?”와 동의어가 되어 버린다. 사실 이런 질문에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한다.
가족, 친지, 친구들을 만나면, 곧 잘 이야기가 나온다. “나한테 좋은 (앱, 예전엔 웹) 아이디어가 있는데…” 그리고 쌍팔년도 아이디어를 듣다 행여 부정적 의견이라도 살짝 드러내면, 당장 나는 식견 없는 사람으로 비난 받는다.
학교, 연구소, 기업에 계신 분을 만나면 늘 묻는다. “뭐 쌈빡한 아이디어 없나?” 예전에는 애플 이야기를 하면, 항상 새롭고 신선하긴 하지만 별로 와 닿지는 않는다고 하였지만, 요즘은 진부하고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네 들이 아직 잘 모르는, 미국의 신규 스타트업 이야기를 하면, 다시금 그때의 애플 취급을 한다.
요즘은 아이디어라고 하면 마치 헐리우드 영화의 하일라이트 장면처럼 턱이 쭉 빠지게 하는 그런 것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흔히 말해서 애플이 애들 다 버려놨다는 뜻이다. 이런 것이 불편했지, 이런 식으로도 되었으면 좋겠지… 이런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우와 멋져 보여. 우와 최첨단인데. 이런걸 느끼게 해 줘야 아이디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도 대게 그렇지만, 나도 식당에 가면 늘 이런 소리를 한다. “아! 내가 하면 정말 잘할텐데” 정말 내가 이 가게를 대박 가게로 만들 수 있는 대박 아이디어가 넘쳐 흐른다.
나는 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피치 못할 경우, 축구 같은 것을 사람들과 같이 볼 때가 있다. 그럴때면 항상 누군가는, 선수가 헛발질 할 때마다, “아후, 내가 눈감고 해도 저것보단 잘하겠다” 이런식의 탄식을 한다.
식당에서의 좋은 사용자 경험(UX)란 무엇일까? 좋은 맛은 기본이고, 깨끗한 청결, 우아한 인테리어, 친절한 서비스, 그리고 예상보다 저렴한 가격 이 모든 것이 어우려져야 식당을 기분 좋게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다음에 이 식당을 또 찾으려면, 식사후 나오는 독특하고 상큼한 디져트 서비스! 이런것이 기억에 남게 하는 포인트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제대로 된 재료비 지출하려면, 인건비도 맞출 수 없는 구조이고, 인건비도 안나오는데, 인테리어는 생각도 할 수 없다.
축구선수는 또 어떨까? 골문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리는 선수의 판단력이 쇼파에 앉아 맥주 치킨을 먹으며, 입체적으로 중계하는 TV를 보면서 내리는 판단과 같을 수 있을까? 아마도 선수는 답답한 호흡과 기진맥진해 가는 다리의 근육, 그리고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듯 축구 선수의 기막힌 찬스는 최악의 조건에서 마지막 한 스텝으로 결정 나는 것이다.
그렇다 체력이다. 아이디어가 문제가 아니다.
실리콘 밸리의 조언자는 항상 충고한다. “아이디어는 값싼 것이다” 아이디어를 지나치게 부정하지 않았나 하는 반발이 들기도 하지만, 아이디어(요즘 흔히들 말하는 그 아이디어)란 좋은 식당에서 맛 좋은 음식을 친절한 서비스와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즐기고 난 뒤 마지막에 나오는 독특하고 상큼한 디저트 같은 것이다. 중요는 하지만, 본체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이고, 실패한 본체를 살려줄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애플의 WWDC(World Wide Developer Conference) 에 참석했을때, 애플이 개발자들에게 자신의 성공 비법을 공개했었다. 항상 시작은 “문제의 인식”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가장 단순하고 우아한 해법을 찾고, 그것이 만족으러울때까지 반복한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Wow Effect”, 우리말로 하면 “우와 효과”를 더한다고 한다. 그것이 애플의 비법이다. (물론 애플은 Wow Effect 를 넣는 것이 좋다고 해 준 조언이다.) 오랫동안 애플의 비법을 봐왔고, 그리고 그것을 잘 배우고, 잘 수행한 많은 사례를 봐왔다. 우리끼리는 그런 사례를 “애플 스럽다”라고 말한다. 이 삼단계를 정확히 밟은 것이다. 하지만, 이 삼단계를 거치지 않고, Wow Effect 에 매몰된 경우를 많이 목격한다. 나는 이런 경우 성미급한 “대항마스럽다”라고 말한다.
영화도 아무리 최첨단 기술을 다 쏟아 부어도, 결국 망할땐 그 이유를 “스토리 부족”으로 든다.
“본질”을 이야기하면, 마치 현실세계에서 한발 벗어난 형이상학적인 것을 추구하는 철없는 철학자 대우를 받지만, 언제나 성공한 것에는 “본질”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것을 늘 확인한다. 또 하나, 애플의 수사법 중에 좋아하는 표현이 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본질에 관한 애플의 진지한 자세를 엿볼 수 있고, 그들의 설명은 그것을 충분히 공감하게 만든다.
본질에 관한 진지한 생각. 그것을 풀어낼 때까지 반복할 수 있는 끈기 있는 체력. 그리고 마지막에 살짝 더해주는 위트있는 아이디어. 항상 무엇을 하든 이 순서를 생각한다. 쉽지는 않지만…

mobile device ppi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displays_by_pixel_density
이 페이지 맘에 든다.

  • iPhone 3GS, iPhone 4, iPad 2, Kindle 3, Kindle Fire, Galaxy Tab, Galaxy S 이것들이 내가 현재 쓰고 있는 것들이다.
  • 개인적 기준으로, 260 ppi 이상은 되어야 눈이 편안했다.
    • 영문만 읽을 때에는 100-150 ppi 도 충분했지만, 한글과 같이 복잡한 글자를 위해서는 260 ppi 이상이 반드시 필요했다.
  • iPad 3 가 추정컨데, 264 ppi 로 나온다고 한다.
    • 생각보다는 그리 획기적인 ppi 는 아니다. 해상도로 환산하면 획기적이긴 하지만…
    • 눈이 부실 정도의 해상도는 아니다. 이미 현재의 디바이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미 익숙한 ppi 이다.
    • A4 혹은 US-Legal 크기로 된 PDF 파일을 보기에 충분한 해상도 일 것이다.
  • 돌이켜 보면, e-ink 디바이스 들의 불만족은 ppi 로 부터 시작되었다.
    • Kindle Fire 가 큰 매력을 못 준 것도 (특히 한글을 보는 나에게) 아마 ppi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문일때에는 편안하지만, 한글을 볼 때에는 정말 모자라 보인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꼰대 진보

수학에서 “공리(Axiom)” 이란 개념이 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공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리(公理, Axiom)는 이론체계 가운데에서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되는 명제(命題)이다. 어떤 다른 명제들을 증명하기 위한 전제로 이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가정을 가리킨다. 지식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나 근거를 소급해 보면 더 이상 증명하기가 곤란한 명제에 다다른다. 이것이 바로 공리이다.

좀 더 어렵게 말하면, 화학의 원자와도 같은 개념으로, 일단 수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참이라고 하자 라고 더이상 따지지 않는 지점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공리가 절대 참은 아니다. 위 설명처럼, 참이라고 증명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더해서 “정리(Theorem)” 이 있다.

공리를 그 전제로 시작하여, 연역적 수단에 의해 유도되는 명제는 정리(定理)라고 한다.

즉, 모든 명제(우리가 단언적으로 말하는 것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매번 따지기 힘들기 때문에, 미리 똑똑한 사람들이 어떠한 명제가 공리로 유도될 수 있다고 증명해 놓은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수학의 과정은 공리로 증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정리로서 증명하여, 참 거짓을 논한다. 그리고, 그 유도하는 과정이 논리적인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다.
수학이 정말 멋진 이유는 공리를 공리로 두었기 때문이다. 절대참, 절대 진리도 아닌, 그냥 공리이다. 공리가 무너지만, 모든 수학적 정리들이 무너지고, 그 정리로 증명한 많은 것들이 무너지지만, 그래도 공리는 절대 진리는 아니다.
하물며,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논리에 절대 진리란 있을까? 이 공리의 자리엔 “상식”이 보통 들어가지만, 대부분의 경우, 개인적 “신념”이 들어간다.
우리는 때때로, 사회학적 현상에 대해서 아주 논리적으로 접근 하는 것을 많이 보는데, 이 사회학적 명제를 논리적으로 공리(혹은 신념)으로 증명한다 하여도, 그 기반은 절대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 증명 과정이 매우 논리적이고, 수학적이라 하여, 그 명제가 수학적 참, 혹은 절대적 참이 될 수는 없다. 스스로에게 아니면 타인에게 논리적으로 보이게 하는 장막일 뿐이다.
우리는 그 기준점이  “사회적 상식” 혹은 “사회적 합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또한 그것이 항상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그 논리가 성립한다. 항상 옳은 “신념” 혹은 “진리”를 기반으로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논리적인 것이 아닌 종교적,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 되어 버린다.
가끔 보면, 서로 극한에 있을 것 같은데, 논리적 진보주의자와 무대뽀적인 꼰대 아저씨 사이에 묘한 동질감을 발견한다. 이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공리(신념)가 다를 뿐, 그 접근 방식은 동일하고, 그래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동의하는 자들에게는 너무도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나 하는 일방적인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