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한참 오래전, 오랫동안 잘 알던 분이랑 밤새 논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꽤 격하게 논쟁을 하여, 감정까지 상해버린 일이었습니다. 내용은 단순하게도 회사의 주인이 누구냐는 이야기 였습니다. 나는 아주 드라이하게 “회사는 원론적으로 주주가 주인입니다. 사원이 주인이 아니죠. 주인이 위험을 감수하여 투자하고 그 책임을 집니다. 사원이 주인이라는 건, 행여 공무원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나는 나도 공돌이이지만, 상식을 조금 가진 공돌이가, 상식이 없는 공돌이에게 훈계하듯이 종일 떠들어 댔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입장이 달랐습니다. 오히려 나에게 실망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인줄 몰랐다면서… 나는 그럴수록 그 사람이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럴수록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은 암흑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때는 몰랐었습니다. 그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했었습니다. 당시는, 그분도 나도 사회초년생이었습니다. 개발을 좋아했고 열정에 가득 찼었고, 취업을 했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열정을 제품 개발에 쏟아 부었는데, 그분이 받은 대접은 열심히 개발은 하되, 의견 따위는 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시키는 것만 하지 왜 말이 많냐는 것이었죠. 그 때 그분이 가진 감정은 마치 씨받이 같은 것이겠죠. 내가 배아파 낳았지만, 내가 키울 수 없는 내 자식 같은 것이겠죠. 그분은 그런 혼란을 겪고 있었던 중이었을 겁니다.

마치 열정이 말라 타 들어가는 것을 온몸으로 아파하며 신음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이후로 비슷한 이유로 열정이 꺼져가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봐 왔습니다. 때론 내가 열정을 꺼트리는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매우 안타깝게 지켜봤습니다. 옆에서 조언도 하고, 응원도 하고, 비아냥대기도 하고, 참견도 했습니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들은 열정이 생기지 않는 수만가지 이유를 이야기 합니다. 열정이 생겼다가 식어버린 사람도 열정이 사라지게 된 수 없이 많은 이유를 말해 줍니다. 하지만, 열정에 가득찬 사람들을 보면, 시련이란 한낯 술자리 이야기꺼리 밖에 안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그렇듯, 장애가 크면 클 수록, 사랑의 깊이가 더 깊어지듯, 열정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장애물에 쉽게 마음이 접어지면 그거 진짜 사랑이 아니듯이, 열정도 그런것 같습니다.

나는 열정을 가진 것이 천부적 재능을 가진 것보다 더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 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말이죠. 열정을 가진 사람은 심심하지 않습니다. “뭐 재미있는 일 없니?” 라고 묻는 사람은 열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언가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 심심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늘 바쁘고, 평생을 다해도 모자랄 할 일 들이 쌓여 있습니다. 후회가 없습니다. 마치 사랑의 열병을 앓은 것처럼 엄청난 감정의 수고로움은 있을 지라도 후회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열정이란 한 인생에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라 생각 됩니다. 오랜기간 꺼지지 않는 열정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요즘 드는 또 다른 생각이 열정이란 만들어 내는 것도, 지켜내는 것도 아닌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천부적 재능이, 말 그대로 주어진 것이듯 ,열정도 주어지는 것인 것 같습니다. 뭔가 매우 비관적이고 운명론적 사고관이지만, 요즘 드는 생각이 그렇습니다. 열정을 가져 보아라, 열정이 꺼지지 않도록 잘 지켜라는 조언은 천부적 재능을 받아 보아라, 왜 예쁘게 태어나지 않았니 라고 하는 것과 같은 부질없는 이야기 인 것 같습니다.

나의 하루가 심심하지 않을 만큼 내게 열정이 있다면, 그것으로 정말 감사한 일이고, 열정으로 활활 불타는 사람을 만난다면 절세 미인과 함께하는 것만큼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인것 같습니다. 열정이란 화장실에서 힘주면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미인의 얼굴에서 자연발광하는 광채와 같은 것 같습니다.
요즘 드는 생각이 그렇습니다.

나의 맛집

어느날 인배군의 올린 트윗문구중에서 인용한 한마디가 찡하게 남았다.
“You are what you eat”
갑자기 든 생각이, 내가 만약 죽고 나면 나란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많은 철학적 답변을 뒤로 하고 가장 명쾌한 답변이 바로 위 경구 인 것 같다. 제사상에도 조상님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을 올려서, 기억하는 것과도 같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정통에 가까운 방법인 것 같다.
그래서 갑자기 나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인 나의 맛집 리스트를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하고 나니, 남들에게 어께에 힘주어 가며 보여줄만한 그런 리스트가 못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게 바로 내 모습인데..
 
나의 맛집 목록
 
 

구글 아저씨, 스토리가 없어요

구글 I/O 가 얼마전에 끝났다. 다들 이번만큼 흥미로운 발표는 없었다고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공감을 가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애플과 비교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뼈속까지 애플빠이기도 하지만, 애플이 매번 나를 흥분시키는 그 뻔한 수작, 그 뻔함이 구글의 것에서는 없었다.
그게 무엇이냐면,
애플의 제품 발표는 늘 똑같은 포맷을 가진다. 특히 애플 제품 발표때마다 5분짜리 짤막한 비디오가 나오는데, 나는 이 비디오를 매우 좋아한다. 아니 볼 때마다 마치 파블로브의 개처럼 묘한 감동에 빠진다. 이 비디오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조나단 아이브 : 우리는 기존 제품에서 한계를 발견했다. 이것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근본적으로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 밥 맨스필드 (이젠 떠났지만) : 완전히 새로운 하드웨어가 필요했다. 이전과는 다른 근본적인 새로움 ( 유니바디 시리즈, 레티나 시리즈 등) 을 시도하였다. 또한 업계를 앞서는 시도 (플래시 메모리, 매립형 배터리 등) 로 혁신 하였다.
  • 조나단 아이브 : 과거로 부터의 단절 ( 커버 글래스의 제거를 통한 선명함을 높이고, 더욱 실감나는 영상 ) 새로운 시도 ( 비대칭 팬을 통한 저소음 )  이런것은 애플만이 가능한 것 아이디어다.
  • 필 쉴러 : 제품 사양이 얼마나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지. 제품의 구성이 얼마나 사용자들이 원하는 것들인지.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시장에 적기에 내놓은 것임을 강조한다.
  • 스캇 포스톨(iOS) 혹은 크렉 페데리기 (OS X) :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로 완성된다. 이러한 새로운 하드웨어의 신기능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서, 소프트웨어 세트를 완전히 새로 구성했다. 모든 애플 소프트웨어가 이러한 새로운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재작성 되었다.
  • 조나단 아이브 : 혁신이란 ….

이런 식이다. 어떠한 제품을 발표하더라도, 거의 동일한 패턴이다. 등장 인물은 바뀌더라도 이 포맷은 계속 유지해 왔다. 스티브 잡스 생전부터, 본인은 등장하지 않고 이 비디오를 연출해 온 듯 하다. 이것은 마치 헐리우드 히어로 무비 영화 패턴과 똑같다. 각 배역에게 캐릭터를 주고, 그 캐릭터에 맞는 초능력을 선사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스토리는 늘 뻔하다. 어떠한 악당이 나와도 이 캐력터가 초능력을 발휘해서 적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반복되는 이 패턴에 즐거워하고 재미있어 한다.
애플 제품 발표도 마찬가지다. 문제 상황이 주어지고, 이것을 혁신하라는 지령이 떨어진다. 각 능력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동원하여 이 문제를 풀어냈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의 협공은 늘 언제나 성공적이다. 마치 픽사의 인크레더블 가족을 보는 것 같다. 늘 감동적일 수 밖에 없다.
이번 구글 발표에서는 구글 글래스를 끼고 공중에서 뛰어 내렸다. 그 장면을 실시간 중계하는가 하면, 스카이다이버가 발표회 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고, IT 제품 발표회 장인지, 유니버셜 스튜디오인지, 미래로 초대된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 였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보고 있으면서 – 유튜브로 현장감 없이 봐서 인지 몰라도 – 저거 어디다 쓰는 물건일까?, 나는 과연 필요할까? 아니 공짜로 줘도 쓰고 다닐까? 쓰고 다닌다면 무엇을 위해서? 의문에 의문만 계속 들었다. 현란한 쇼는 잠시 이지만, 이런 의문에 대한 공감대를 주지는 않았다.
마치 재미없는 헐리우드 영화의 판박이 처럼, 엄청난 화력과 엄청난 규모의 전투씬. 화려한 CG. 하지만, 도대채 저들은 왜 싸우는지 공감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 구글은 역시 대단한 회사야. 첨단 기술을 이끄는 것은 구글이었어. 이런 말 밖에는 해줄게 없었다. 나와 구글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이, 그냥 구글만의 쇼라는 느낌만 들었다.
왜 글래스를 하게 되었고, 구글이 글래스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고, 이것을 통해서 얼마나 유용하고 가치있는 것을 발견했는지 그런 공감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내 아이의 두손을 잡아주면서 비디오를 찍고 싶었다는 것 말고는 말이다.
물론 나는 구글이 하는 글래스 프로젝트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아직은 그 유용함을 설득해 주지는 못했지만, 오랜기간 동안 컴퓨터과학 연구실에서 잠자고 있는 웨어러블컴퓨팅을 소비자제품으로 이끌어내는 역사적인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품으로 만들어서 보급하고, 사람들이 쓰다보면 그 가치를 언젠가는 발견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구글은 정말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은 정말 장한 일이다. 무인 자동차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장하고 대단하지만, 스토리가 없고, 재미가 없다.
 

모바일 기기에 대한 소원 한가지

모바일 디바이스를 사용하다보면 딜레마가 있는데, 바로 보안에 관한 것이다.
iPhone, iPad 를 사용할 때, Lock 을 걸 것인지, 안 걸 것인지 항상 고민이다. Lock 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내 핸드폰을 언제 잃어버릴지 모르는데, 내 핸드폰 안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있다. 이메일부터 시작해서, 요즘에는 거의 모든 파일이 클라우드에 있는데, 이 클라우드 앱들이 자동로그인으로 들어가 있다. iPad 도 마찬가지다. Lock 을 해 놓지 않고 잃어버린다면 엄청난 재앙이다.
하지만, Lock 을 해놓고 쓰면 너무 귀찮다. 매번 쓸 때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어야 하는데, 이게 왠만큼 해도 익숙해 지지 않는다. 더구나 요즘 모바일 디바이스의 사용 행태가, 생각날때마다 꺼내서 쓰고, 다시 집어 넣고를 반복하기 때문에, 꺼낼때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는 일은 여간 귀찮은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몇년간 핸드폰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언제가 일어날 그 한번의 사건에 대비해기 위해서, 매일 수백번의 노가다를 한다는 현실이 고달프다.
사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Over-the-shoulder hacking 이라고 하는 주변사람의 눈초리때문이다. 사실 나 스스로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주변사람이 폰을 꺼내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나도 모르게 눈이 가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알게 된다. 이거 쪼잔하게 사람들 눈 의식해서 뒤로 숨어서 비밀번호 입력하는 사람 거의 없다. 보안이란것이 주변사람에게는 무력화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안드로이드 쪽에서는 애초에 비밀번호 보다는 패턴 입력을 통해서 하는 방법도 있었고, 최근에는 얼굴인식으로 하면 어떨까 하다가, 사진으로 뚫려 버리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그외 멀티패턴과 같은 방법으로 주변사람에게 안들키게 하는 여러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아직 이런 심각성이 공유되지 않아서 인지, 널리 활성화 되지는 않은 듯 싶다.
나는 그것보다는 좀 더 하드웨어 기반의 솔루션이 좋아 보인다. 최근 iPhone 4S 부터는 Bluetooth 4.0 스펙을 지원한다. 여기에는 LE (Low Energy) 기술이 있는데, 말그대로 전기를 적게 먹는다는 말이다. 주응용 분야로 생활형 심박계, 맥박계 같은 의료기기와 스마트폰의 연동을 예를 들었는데, 이것보다는 개인인증용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싶다.
간단히 말해서, 내 스마트폰과 쌍을 이루는 단추만한 장비가 있다. 이 단추는 내 옷(바지 허리고리쯤 좋을 듯 싶다)에 살짝 끼워두는 것이다. LE 기술을 쓰면, 24시간 이상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내 스마트폰이 이 단추장비의 1m 이내에 있을 때에는 비밀번호를 물어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1m 이상 떨어 졌을 때에만 비밀번호를 물어보게 한다. 이 단추장비는 내 몸에 항상 붙어 있기 때문에, 실수로 어디에 두고 올 일도, 누군가 훔쳐갈 일도 없다. 내 등뒤에 딱 붙어서 스마트폰을 몰래 보지 않는 이상, 보안은 충분히 안전할 듯 하다.
사실 이런류의 아이디어는 말로 설명해서 별로 와닿지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설득해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애플이 만들면 모두가 따라서 만들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 없을 것이다. 아니면 정말 나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인가?

대항마들은 왜 레티나를 미리 내지 못했을까?

3월 8일 예상대로 iPad 3 가 발표 되었고, 예상 밖으로 이것은 The New iPad 라 불렸다. “새로운 iPad” 의 특징은 5가지로 정리되는데, 그중 하나만 꼽으라면 당연 레티나 디스플레이이다. 그리고, 이 레티나의 적용은 사실 iPad 2 가 나올때부터 점쳐 오던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iPhone 4 가 레티나를 적용하면서, iPad 에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궁금한게 있다. 대체 왜 대항마들은 이렇게 오래전(대략 1년반전)부터 예측되어 오던 레티나 태블릿을 왜 먼저 내놓지 못했을까? 먼저 선빵을 날리며 선두마로 나갈 수 있었는데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나 나름대로의 추측을 해 보자면,

첫째, 애플은 이미 힘으로도 압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잘 알려진 바대로, 애플이 만든다기 보다는, LGD, 삼성, 샤프 이 세회사가 만든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가격은 대략 70불로 추정한다고 한다. 작년 한해만 대략 4천8백만대의 iPad 를 팔았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봐도, 설마 올해 5천만대 못팔까? 애플은 최소 5천만대 이상 판매계획을 세웠을 것이고, 이들 디스플레이 회사에 선주문을 넣었을 것이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대략 3조 7천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세 회사가 균등히 나눠도 1조 이상의 매출이 간다.
하지만, 상황은 어떤가? 대략의 들려지는 바로는, 이제 막 새로운 공정을 세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단계라 쉽지만은 않다. 올해 5천만대 공급도 버겁다는 이야기가 들려 온다. 이러한데, 애플은 어떻게 했을까. LG 디스플레이에 1조원 선수금 넣어주고 물량 확보 했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경쟁자들은 이 상황에서 과연 물량 확보가 가능할까? 5천만대는 커녕 1백만도도 자신 없는데, 누가 과연 지를 수 있을까? 그럼 반대로 LGD 는 어떨까? 선수금 꽂아주고, 5천만대 물량확보 해 주는데, 다른데서 1백만대만 빼 달라면 과연 줄 수 있을까? (양산 라인이 안정화 이후라면 모를까)
애플이 최초의 레티나 태블릿을 출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힘에 의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둘째, 레티나에 맞는 OS 는 누가 만들어 주나?

어찌어찌 해서,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확보 했다고 치자. 그럼 레티나에 OS(아마도 안드로이드) 최적화는 누가 시켜야 하나? 그보다 먼저, A5X 칩셋 처럼, 4배향상된 GPU 도 받쳐줘야 한다. 이거 어디서 구하나? 그리고 디바이스 드라이버 최적화 부터, 웹 브라우저까지 모두 재정비에 들어가야 한다. 성능적인 문제는 오히려 간단하다. UI 위젯 콤포넌트 부터, 전반적인 모든 앱 라인에 이르기까지, 레티나가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구글이 해줄까? 아니면 디바이스 제작업체마다 해야 할까? 이것 참 애매하다. 그리고 구글이 나선다 해도, 앱개발사들에게 레티나 최적화를 선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여러모로 난감하다. 아직 태블릿 환경도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레티나 최적화라는 주제는 앞서나가도 너무 앞서 나간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파편화로 어깨가 무거운 개발사들은 어떻게 위로해 줄까?
누군가 제조사 내에서 레티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을때, 네가 나서서 해 보라고 하면, 아마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내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세째, 레티나가 좋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이 있었을까?

만약, 그 누군가가, 애플과 같이 디스플레이 업체에 배팅도 하고, 그에 맞는 OS 및 환경 셋업을 위해 천문학 적인 투자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을때, 그렇다면, 레티나를 촛점으로 마케팅 해서, 팔아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전에, 내부적 보고라인 안에서라도 레티나로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껏 투자한 것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을까?
애플은 레티나를 빛나게 할 PC 급 소프트웨어, iWork, iLife 로 시작해서, 최근 발표한 iBooks 까지, 그리고 결정적 한방. 레티나에 최적화 된 인피니티 블레이드까지 준비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대항마의 입장이라면 어떤쪽으로 마음이 기울까? 레티나 디스플레이 생산이 안정화 되고, 물량이 확보되기까지 기다렸을 테고, 구글이 애플의 레티나 iPad 성공에 자극을 받아서 움직여 주기를 기다릴 테고, 그리고 애플의 레티나 iPad 를 보고 아이디어와 힌트를 얻고 비집고 들어갈 곳을 찾고 난 다음, 그리고 움직이지 않을까? 미리 움직여 득을 볼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 매우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지만, 이렇게 곰곰히 생각해 보지 않았을 때에는 매우 궁금한 것이었었다.
또 한가지,
내가 레티나 iPad 에 대해서 매우 흥분을 하고,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하고 다니니, 가끔 궁금해 하며 묻는 분도 계신다. 단지 해상도 하나 좋아 진 것 뿐인데, 뭘 그리 호들갑을 떠나요? 애플도 속내를 들어내기를 iPad 가 Post-PC 로 자리잡기를 기대한다. 사람들은 과거 PC 에서 했던 많은 것들을, PC 가 아닌 iPad 에서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PC 에 익숙하지 않을 수록, PC 비전문가 일수록 이 발견의 속도가 더 빠르고, 더 빨리 적응을 한다. 레티나는 이 Post-PC 시대로 넘어가기 위한 (아마도 내 생각에는) 마지막 장애물을 넘어가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과거를 돌아보면, PC 시대는 사실 애플컴퓨터의 탄생 만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IBM PC 의 탄생도 아니다. 애플컴퓨터는 여전히 컴퓨터 광들의 취미에 불과했다. 아마도 VisiCalc의 등장으로, PC 가 모두에게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물론 더 크게는 IBM PC의 LOTUS 1-2-3 일 것이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iPad 가 보여 준 가능성을 조용히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예를 들어, iBooks 2를 통해서, 전자책으로서 가능성만을 보여주었다면, 레티나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전자책으로 쓰이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여러 기업에서도 iPad 사용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아예 PC 를 사용하지 않고, iPad 만으로 업무가 가능한 직군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이러한 PC 없이 iPad 만 사용하는 것을 놀랍지 않은 일로 만들 것으로 보인다. LOTUS 1-2-3 가 PC 를 보통사람의 집과 사무실 책상위에 두는 것을 놀랍지 않은 일로 만든 것처럼.
나는 거의 1년반을 레티나 iPad 를 기다려 오면서, 꼭 애플이 아니더라도 레티나만 장착해 준다면 누구라도 충성을 맹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소원을 맨 먼저 들어 준 것이, 애플이라는 점이 참 묘하다. 나는 이 레티나와 함께 애플은 올해도 또한번 도약한다에 배팅을 한번 걸어본다.